목차
1. 줄거리
2. 작품성
3. 작가스타일
1. 줄거리
에밀의 성장에 따라 5부로 구성되어 있는 에밀은 태어나서부터 결혼에 이르기까지 각 성장기에 따른 교육 단계의 형태를 보여준다. 제1부는 출생에서 다섯 살까지의 발육에 대해 논하고 있다. 이 시기는 아이의 발육을 억압하거나 왜곡하지 않아야 한다. 신체발부를 자유롭게 해야 하며 아이의 성장을 가로막는 배내옷은 입히지 않아야 한다.
이처럼 자연 상태 그대로 아이를 키워야 하는 것을 강조했다. 제2부는 다섯 살에서 열두 살까지의 교육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이 시기에는 섣부른 지식보다는 사물에 대한 관찰을, 경험을 통한 깨달음이 필요한 시기이다.
특히 이 시기의 교육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서둘지 말라는 것이다. 흔히 우리는 조기 교육을 강조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아이로 하여금 더욱 빨리 오류에 빠지게 할 뿐이라고 강조한다. 제3부는 열두 살에서 열다섯 살에 해당하는 시기이다. 감각에 이성을 더한 훈련을 실시해야 하는 시기, 즉 학문을 가르쳐야 할 시기이다. 타인의 지식이나 경험보다는 자신의 관찰에 의해 체현되니 지식이 중요하다. 편견이나 고정관념에 휩쓸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제4부는 청년기의 교육으로 열다섯 살에서 스무 살까지의 나이가 이 시기에 해당한다. 이때가 인간으로서는 제2의 탄생기라고 할 수 있다. 도덕적이며 종교적인 감정이 싹튼다. 또 성에 눈을 뜨는 시기이기도 하다.
기질의 변화와 함께 신체는 더욱 성숙해져 성인으로서의 징후가 나타난다. 제5부는 성년기에 이른 에밀이 배우자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다. 소피와의 관계를 통해 결혼이란 무엇이며 남녀가 할 일이란 무엇인지, 그 역할과 책임에 대해 이야기한다. 또 부부 사이의 윤리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2.작품성
교육서이자 철학서인 동시에 인간 성장의 내면을 기록한 보고서이기도 한 이 책은 출간된 지 2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교육에 반드시 필요한 교육 지침서로 제일 먼저 손꼽히는 책이다. [에밀]에는 아이가 탄생하는 순간부터 성년기, 그리고 배우자를 찾아 가정을 꾸리고 사회의 일원으로서 그 의무를 다할 때까지의 교육에 관한 모든 질문과 해답이 담겨 있다.
인간은 처음 태어났을 때는 자유롭고 선량하지만 인간 자신들이 만든 사회 제도나 문화 등에 의해 악한 것에 물들고 불행한 상태에 빠지게 되므 교육서이자 철학서인 동시에 인간 성장의 내면을 기록한 보고서이기도 한 이 책은 출간된 지 2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교육에 반드시 필요한 교육 지침서로 제일 먼저 손꼽히는 책이다.
[에밀]에는 아이가 탄생하는 순간부터 성년기, 그리고 배우자를 찾아 가정을 꾸리고 사회의 일원으로서 그 의무를 다할 때까지의 교육에 관한 모든 질문과 해답이 담겨 있다. 인간은 처음 태어났을 때는 자유롭고 선량하지만 인간 자신들이 만든 사회 제도나 문화 등에 의해 악한 것에 물들고 불행한 상태에 빠지게 되므로, 자연과 본성에 가까운 교육만이 참된 인간성을 형성한다는 루소의 인간 교육의 중심 사상이 녹아 있는 책이다.
3. 작가스타일
저자 장 자크 루소 Jean Jacques Rousseau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가난한 시계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가 그를 낳고 며칠 만에 죽는 바람에 일찍부터 친척집 등을 전전하며 자랐다. 16세 때 모험가의 삶을 꿈꾸며 제네바를 떠나 강력한 후원자인 바랑 남작부인을 만나 사교계와 학계 사람들과의 교류를 시작했다. 거의 독학으로 철학과 문학, 음악을 공부했으며 백과전서 파인 디드로를 비롯해 개혁적인 철학자들과 사상적 교류를 나누었다.
1750년 디종의 아카데미 현상 논문에 〈학예론〉이라는 글이 당선되면서부터 사상가로서 이름을 알렸다. 그는 인간은 본래 선하지만 사회와 문명 때문에 타락해 간다고 주장했다. 이후 〈인간불평등기원론〉, 〈사회계약론〉을 발표함으로써 그의 사상 체계를 굳건히 한다. 그리고 〈정치 경제론〉, 〈언어기원론〉 등을 발표하면서부터 당대의 지식인들과 분명한 견해 차이를 보인다. 1762년에 출간된 《에밀》이 소르본 대학 신학부의 고발로 유죄선고를 받게 되자, 프랑스를 떠나 스위스와 영국을 전전하며 자신을 옹호하는 글인 〈고백록〉과 〈루소는 장 자크를 심판한다〉를 발표했다. 1778년 프랑스 파리 북쪽의 지라르댕 후작의 영지인 에르므농빌로 피신했다가 그곳에서 생애를 마쳤다.